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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간 여행

구리시 동구릉 답사

2022년5월28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답사.

 

안녕 하세요? 이웃님들!~^.^

 

저, 어제 우리나라 최고 최대 다수의

조선 왕들이 잠들고 계시는 세계 문화유산인

구리시 동구릉을 답사 하였습니다.

동구릉에 잠들고 계시는 9분의 왕들의 릉과 왕후릉

모두 돌아보고 업적과 역사를 다시한번 배우고 돌아 왔습니다!~

9분의 왕릉 수릉부터 숭릉까지모두 돌아보고 사진으로 담아 왔습니다.

해서, 일일 설명 정보는

동구릉 홈페이지(구리 동구릉 (cha.go.kr) 참조 하시고

오늘 담아온 사진 제가 돌아본 왕릉 순서대로 포스팅 하니

그냥 저와 함께 제가 답사길 눈으로 감상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자! 가보겠습니다!~^^

 

5월28일 오전

서울 강남 지할철 2호선 강변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빠져 나와 구리시 동구릉 가는 시내버스 1-1번 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서 동구릉에 도착 하였습니다

입으로 전해 들었던 동구릉 역시 세계문화 유산 될만한 릉이였습니다.

9분의 조선 왕들과 왕후들의 릉 이라 그런지

생각 보다는 크고 넓었습니다.

 

매표소

 

동구릉 역사 문화관

 

 

 

 

 

 

 

 

이제 본격적으로 동구릉 답사길로 들어 섭니다.

 

 

매포소를 지나 약300m 지나니 홍살문이 있더군요.

서울의 다른 릉들과 달리 관람 초입부터 홍살문 이 있네요?

 

 

 

 

동구릉 관리 사무소

 

재실

 

동구릉 초입 홍살문을 지나 한참을 푸른 소나무길을 지나니

왕들의 제를 지낼때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이 먼저 눈에 들어 옵니다.

 

재실 내부

 

재실 사랑채

 

재실 앞공터 휴식처

 

재실 공터 휴식처에서

먼저 동구릉 관람 안내서 약도 대로 수릉,현릉,건원릉,목릉 순으로.

답사하러 수릉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수릉으로 가는 길

 

수릉과 홍살문

 

수릉 정자각

 

수릉綏陵(추존 문조와 신정황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합장릉

능의 조성 :

1855년(철종 6), 1890년(고종 27)

능의 구성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보통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각각 2좌씩 놓았으나 조선 후기부터 조성된 합장릉은 혼유석을 1좌로 줄여서 조성하였다.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으로 조각하였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형태로 왕이 오른쪽, 왕비가 왼쪽에 모셔지는 것이 원칙이나 수릉은 왕이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모셔져있다. 이는 세상을 떠날 때의 신분차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능의 역사

문조는 처음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년(순조 20)에 세상을 떠나, 경종의 의릉(懿陵) 왼편에 연경묘(延慶墓)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綏陵)이라 하였으며, 1846년(헌종 12)에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현 광진구 용마산)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다가 1855년(철종 6)에 다시 천장론이 거론되어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신정익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비각

 

수릉을 답사고 현릉으로 !~

 

 

현릉 홍살문

 

수릉에서 가까운 곳에 현릉이 있었습니다.

 

현릉은 조금 특히 합니다.

현릉 정자각

 

현릉顯陵(문종과 현덕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

1452년(단종 즉위), 1512년(중종 7)

능의 구성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문종의 능 병풍석의 무늬는 이전의 영저와 영탁대신 구름무늬로 바뀌었고, 혼유석 받침대인 고석의 수량도 4개로 줄었다. 능침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배치하였고, 중계에는 문석인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상설로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현릉 이후부터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실록)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의 때문이었다.

능의 역사

1452년(문종 2)에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세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지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건원릉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처음 문종은 세종의 구 영릉(서울 내곡동 헌릉 서쪽) 근처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나 자리가 좋지 않아 현재의 자리로 정하였다.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상을 떠나기 11년 전에 왕세자빈 신분으로 1441년(세종 23)에 먼저 세상을 떠나, 안산의 소릉(昭陵)에 모셔졌었다. 이후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친정 어머니와 남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되었다가, 1512년(중종 7)에 복위되어 다음 해인 1513년(중종 8)에 문종의 현릉 동쪽 언덕으로 사후 72년만에 왕의 곁으로 능을 천장하였다. 이 때 두 능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유 없이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현릉을 답사하고

조선 건립 이성계왕의 건원릉으로 길을 재촉 합니다.

 

견원릉 길은 역대 왕들과 달리 소나무가 우겨진 사이로

길이 나 있습니다!

 

저만치 건원릉이 보입니다.

 

건원릉 홍살문

 

 

건원릉 정자각

 

 

건원릉(태조 이성계)

멎집니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산 곳에 건원릉

여주 세종대왕 릉과 견주도 손색이 없는 릉 같습니다.

 

건원릉健元陵(태조)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단릉

능의 조성 :

1408년(태종 8)

능의 구성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청완(靑薍, 억새)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능침에는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방울) 등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개씩 서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태종대에 세운 신도비(보물)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능의 역사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6월 28일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능지를 정하였다. 7월 말을 기하여 산릉 공사를 시작한 후 9월 9일에 발인하였다. 산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본인의 자리(신후지지)를 미리 마련해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태조(太祖) 이야기

태조(재세 :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는 추존 환조와 의혜왕후 최씨의 아들로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에 화령부 사저에서 태어났다. 태조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고,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침입 시 공을 세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이 후 정권을 잡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제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정종(定宗)에게 양위하였다. 태종 즉위 후엔 태상왕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다. 1408년(태종 8)에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태조고황제로 추존되었다.

 

태조 비각

 

태조 이성계 건원릉 답사후 우측 오솔길 처럼 생긴 길

저 길 따라 목릉으로

 

 

 

 

목릉과 홍살문

 

 

목릉의 정작각

 

목릉穆陵(선조)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

1600년(선조 33), 1630년(인조 8), 1632년(인조 10)

능의 구성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상설은 선조의 능과 같다. 특히 의인왕후 능침의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자각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 앞에 있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에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기존의 목릉 정자각을 이건(移建)하게 되자 의인왕후 능 앞에 있던 정자각은 헐었다. 이 후 인목왕후의 능이 조성되면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건이 번거롭다하여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을 향하여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능의 역사

목릉은 처음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가 정유재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선조 33)에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로 조성되었다. 이 후 선조가 1608년에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산줄기(현 헌종의 경릉)에 목릉이라는 능호로 조성하였다가 1630년(인조 8)에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고 의인왕후의 유릉(裕陵)과 목릉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처음 혜릉(惠陵)이라는 능호를 정하였다가 목릉과 능역을 합치자는 의논으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선조(宣祖) 이야기

선조(재세 : 1552년 음력 11월 11일 ~ 1608년 음력 2월 1일, 재위 : 1567년 음력 7월 3일 ~ 1608년 음력 2월 1일)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에 인달방(현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명종의 아들)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명종의 양자 입적)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선조(당시 하성군)를 유난히 아껴 그를 따로 불러 학문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한윤명, 정지연 등을 따로 뽑아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를 알려고 한다.” 명종은 이렇게 말하며 여러 왕손들에게 익선관을 써보게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는 즉위 초에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였다. 훈구세력의 힘을 억제하고 이황, 이이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 『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등을 편찬케 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훈구세력의 관직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 후 1608년(선조 41)에 경운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릉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재세 : 1555년 음력 4월 15일 ~ 1600년 음력 6월 27일)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1600년(선조 33)에 황화방 별궁(경운궁)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의 국장은 임진왜란 이후에 치른 첫 번째 국장이었다. 원래 왕과 왕비의 산릉으로 결정된 자리에 일반묘지나 민가가 있으면 강제로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때에는 전쟁 이후의 수습상황단계였기 때문에 묘를 옮기거나 철거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의인왕후의 산릉자리는 5개월 동안 정하지 못하였다가 겨우 포천 신평에 장지를 정하고 산릉공사를 하였다. 하지만 불길론이 일어나면서 공사를 중단하고, 건원릉 동쪽으로 장지를 다시 정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7개월이 지난 1600년(선조 33) 음력 12월 22일에 장사하면서 겨우 국장을 종료하였다.

선조 때 유학자들의 글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왕비의 원찰이 아닌 곳이 없다.”는 통탄의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의인왕후가 이름 난 기도처마다 자신의 원찰을 설치하고, 아이를 낳기를 발원했기 때문이었다. 왕후는 전국의 명산대찰에 원찰을 설치하고 부처님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건봉사, 법주사 등 여러 사지(寺誌)에는 의인왕후가 보시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자식을 절실하게 바랬던 이유로 불교에 의지하여 평생 불경과 염주를 가까이 하고 살았으며 궁중의 여인들은 그녀를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렀다. 의인왕후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선조실록에는 “의인왕후가 후궁들의 자식을 지나치게 예뻐하여 선조가 장난삼아 질책하면 아이들은 왕후에게로 도망가 숨곤 했는데, 이때마다 왕후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곤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는 의인왕후가 자신의 배로 나은 자식은 아니었을지언정 선조의 모든 자식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해주었음을 알려준다.

 

 

 

인목왕후 릉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재세 : 1584년 음력 11월 14일 ~ 1632년 음력 6월 28일)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당시 소북정권의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에 입각하여 적자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정권이 물러나고 대북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1613년(광해 5)에 계축옥사로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이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일을 겪었다. 광해군일기에는 인목왕후의 죄악이 열거되어 있는데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을 저주한 죄,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역모를 꾀한 죄 등의 대목이 나와 있다. 결국 1618년(광해 10)에 대비의 호칭을 삭탈하고 서궁이라 칭하여 경운궁에 유폐되었다. 이 후 1623년에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옹립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대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첩이 남아 있다. 1632년(인조 10)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목왕후 폐비사건을 시작으로 인목왕후의 일대기를 그린 글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글을 『계축일기』라고 한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과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둘러싼 붕당을 사실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기사문은 인조반정 뒤 왕후의 측근 나인이 썼다고 전해진다. 그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윗전(인목왕후)이 애통해하며 대군(영창대군)을 내보내지 못하고 시간을 끌자 금부 하인들이 밀고 들어와 대군을 업고 나갔다. 그 후 한 달 만에 대군 아기는 강화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런데 미리 알려 주지도 않고 늦도록 안부 전하는 사람도 찾아오지 않으므로 윗전께서는 수상히 여기시고 근심하시는 것이었다. "어째서 오늘은 여지껏 안부도 알려오지 않는고? 필시 무슨 까닭이 있도다. 아무든지 높은 데 올라가 궁 밖 길의 동정이나 살피고 오너라." 명령을 받고 한 사람이 전에 침실로 썼던 다락 근처에 올라가 바라보니 사람들이 돈의문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성 위로 올라가 굽어보니 화살을 차고 창과 칼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고 말을 탄 사람도 많았다. 이제 죽이려나 보다 하고 내려와 바깥사람들이 길 닦는 곳이 있기에 거기 가서 물어 보고서야 대군을 강화로 옮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주관적 관점에서 쓰였으나,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풍속 및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치열한 붕당의 이면을 이해하는데 보조 자료가 된다.

 

목릉 풍경이 이쁘서 한버더 담았습니다!~

 

목릉을 답사후 왔던길 다시 나갑니다

 

건원릉 앞에서 우측길 휘릉으로 갑니다

 

 

 

휘릉 홍살문

 

 

휘릉 정작각

 

휘릉徽陵(인조비 장렬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단릉

능의 조성 :

1688년(숙종 14)

능의 구성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5개로 배치하였다. 조선 전기 왕릉(건원릉~헌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의 영릉 이후에는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는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으로, 휘릉 이후의 왕릉에는 다시 고석을 4개씩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되었다. 휘릉 정자각은 다른 왕릉의 정자각과 달리 정전의 양 옆에 익랑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능의 역사

1688년(숙종 14)에 장렬왕후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휘릉 앞

 

다시 원릉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휘릉에서 100m 정도 걸어니 우측 원릉이 모습을 들어 내고 있습니다

 

 

 

 

원릉 홍살문

 

 

원릉 정작각

 

원릉元陵(영조와 정순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쌍릉

능의 조성 :

1776년(정조 즉위), 1805년(순조 5)

능의 구성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 배치되었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장명등은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기의 표석이 건립되었다. 1비는 1776년 영조 승하 후에 세운 영종대왕 표석, 2비는 영조 추존 후 세운 영조대왕 표석, 3비는 1805년(순조 5)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능의 역사

이곳은 원래 효종의 구 영릉(寧陵)자리였다. 영릉을 조성한 이후 석물에 틈이 생기는 등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어 지속적으로 수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간 봉심(왕명을 받들어 능침을 보살피는 일)을 소홀히 한 관리들을 벌하기도 하였다. 1673년(현종 14) 천릉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결과 재궁과 외재궁에는 흠이 없었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인 구 영릉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는 1757년(영조 33)에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하기를 원하였지만, 손자인 정조가 현재의 자리에 모셨다. 그 후 정순왕후 김씨가 1805년(순조 5)에 세상을 떠나자, 원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英祖) 이야기

영조(재세 : 1694년 음력 9월 13일 ~ 1776년 음력 3월 5일, 재위 : 1724년 음력 8월 30일 ~ 1776년 음력 3월 5일)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1694년(숙종 20)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 등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1762년(영조 38)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53년의 기간을 재위한 영조는 1776년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루는 영조가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와 산책하던 중에 시골의 나무꾼이 향나무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조가 향나무를 어디서 캐온 것이냐고 물으니, 무식한 나무꾼은 제 앞의 임금을 몰라보고,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릉이 있는 고령 양주산에서 캐온 나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무꾼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하여 능이라고 부른 것이지만, 오랜 세월 어머니의 묘를 능으로 꾸며드리고 싶었던 영조는 나무꾼의 ‘소령릉’ 소리에 감격하였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팔던 향나무를 비싼 값에 쳐주고, 그를 소령원 참봉에 제수하였다고 한다. 영조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내면으로는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와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 정쟁에 휘말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큰 아픔을 평생 삭여야 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 이야기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재세 : 1745년 음력 11월 10일 ~ 1805년 음력 1월 12일)는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1745년(영조 21)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757년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에 1759년(영조 35)에 15세의 나이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스스로를 여주(女主, 女君)라 칭하고 실질적인 국왕의 권위를 갖고 모든 권한을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다음해에는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1804년에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 1805년(순조 5)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비각

 

원릉앞에서 경릉으로 갑니다

 

 

원릉과혜릉의 중간 지점 공용 화장실 삼거리

 

공용 화장실 아래

앞에 가는 방문자들 따라 경릉으로 찾아 갑니다.

 

 

 

 

 

경릉 홍살문

 

경릉 정자각

 

경릉景陵(헌종과 효현황후·효정황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삼연릉

능의 조성 :

1843년(헌종 9), 1849년(철종 즉위), 1904년(광무 7)

능의 구성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성황제와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와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의 형태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정자각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성황후, 오른쪽이 효정성황후의 능이다.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었으며, 비각에는 한 개의 표석이 있다. 표석은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 추존으로 바꾼 표석으로, 전면에는 ‘대한 헌종성황제 경릉 효현성황후 부좌 효정성황후 부좌’라 써있다.

능의 역사

처음 경릉자리는 선조의 목릉(穆陵)이 있던 자리였는데, 1630년(인조 8)에 목릉에 물길이 있고 풍수상 불길하다는 심명세의 상소로 목릉천장을 확정하고 구릉을 파고 현궁을 열어 보니 물기가 없어 그의 불길론은 해소되었다. 이 후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가 1843년(헌종 9)에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처음 능을 조성하였다. 6년 뒤인 1849년에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13곳의 택지를 간심한 끝에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의 명당이라고 주장한 효현성황후의 경릉 오른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4년(광무 8)에 헌종의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경릉은 릉 공분이 너무 커서 릉을 이렇게 밖에 담을수가 없습니다!~)

 

 

 

 

경릉에서 돌아나와

조금전 원릉과혜릉 가는 길 중간 지점

공용 화장실 까지 나와 건너편 혜릉길로 들어섭니다.

 

 

 

 

혜릉 홍살문

 

혜릉 정자각

 

혜릉惠陵(경종비 단의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단릉

능의 조성 :

1718년(숙종 44)

능의 구성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조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능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 석물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장명등은 현재 망실되어 터만 남아있고,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능의 역사

1718년(숙종 44)에 단의왕후 심씨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묘를 조성하였다.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왕후로 추존되어, 능호를 혜릉(惠陵)이라 하였다.

 

 

휴유!~

이제 동구릉

우리나라 최대의 릉 동구릉

마직막 숭릉만 남은것 같습니다.

우선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해야 겠습니다.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숭릉 연지란 못이 있는데.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마지막 숭릉을 담아야 겠습니다!~

 

 

 

숭릉 연지못

 

숭릉 연지못이 참 아담하고 이쁩니다.

왕릉다운 연지 못입니다..

 

 

 

30분 휴식을 취한뒤 연지못 지나 마지막 왕릉 숭릉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와!~

이제 동구릉 답사 마지막 왕릉 숭릉 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장장 4시간 이나 소요 되었습니다!~ㅎㅎ

 

숭릉 홍살문

 

숭릉 정자각

지금까지 지나온 왕들의 정자각 달리

숭릉 정자각은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멎지네요!~

 

숭릉崇陵(현종과 명성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쌍릉

능의 조성 :

1674년(숙종 즉위), 1684년(숙종 10)

능의 구성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그 밖의 석양, 석호,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되었다. 숭릉의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영릉(寧陵)이 여주로 천장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망주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세호’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능침 아래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능의 역사

1674년(현종 15)에 현종이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숭릉을 조성할 때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능을 공사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였다. 숭릉 조성 후 9년이 지난 1683년(숙종 9)에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 그 다음 해 숭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현종(顯宗) 이야기

현종(재세 : 1641년 음력 2월 4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 재위 : 1659년 음력 5월 9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아들로 1641년(인조 19)에 청나라 심양 관사에서 태어난 조선 역대 임금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1645년(인조 23)에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원손이 되었고, 1648년(인조 26)에 왕세손이 되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된 후 1659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에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의 싸움이 치열하기도 하였다. 1647년(현종 15)에 창덕궁 재려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루 빨리 아버지인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효종이 있는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볼 정도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어린 현종이 어진 인정을 베푸는 대상은 부모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의 할아버지인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범 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이 때 현종의 나이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루는 궁중에서 나오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린 궐문 밖 군졸을 보고는, 탄식하며 옷과 식량을 제대할 때까지 제공해주라고 명령하고서야 자리를 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 현종의 이러한 효성과 자애로움은 할아버지인 인조에게 큰 신임을 안겨주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이야기

명성왕후 김씨(재세 : 1642년 음력 5월 17일 ~ 1683년 음력 12월 5일)는 본관이 청풍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씨의 딸로 1634년(인조 12)에 장통방(현 서울 종로2가 관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현종 사이에 1남(숙종) 3녀(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1683년(숙종 9)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붕당정치의 여파로 숙종 재위 시의 조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제 2차 예송논쟁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자 서인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명성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우명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 사건을 홍수(紅袖 : 궁녀)의 변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놀란 숙종은 세 사람을 금부에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이들이 죄가 없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고, 오히려 김우명에게 무고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조정에서는 한밤중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회의가 열렸는데, 갑자기 정청에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휘장 뒤에서 대비인 명성왕후가 우는 소리였다. “홍수의 변은 내간의 일이라 과인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께서 복평 형제의 간통사건을 설명해주려고 나오신 것이오.”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위해 둘러댔지만 수렴청정을 하지 않는 대비가 정청에 나타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며, 명성왕후는 큰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의 과격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드디어!!~~

동구릉 9분의 왕릉 답사를 마칩니다.

생각보단 너무나 크고 넓은 동구릉

한분도 빠짐없이 돌아보고 감상에 젖었습니다!~~

 

 

 

 

 

 

처음 들어왔던길 매표소가 있는 길

이제 나갑니다!~

 

동구릉 소개

 

사적 제193호이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하였으며, 1855년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 김인귀의 추천으로 하륜이 택정했다고 전한다.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이 자리하고 있다.

 

9릉 17위(位)의 왕과 왕비를 안장했다. 사적 제193호.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1855년(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동칠릉 등으로 부른 사실이 실록에 전해진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하륜이 나가 살펴보고 택정했다고 전한다. 다른 능도 역시 길지를 물색하다가 이곳을 택한 것인데, 당시 풍수지리설에 따라 유수한 지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59만여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 등 9개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이웃님들!~

혹시사진이 너무 많아 지루 하시지 않으 셨는지요?

하지만 동구릉 역대 조선 왕들과 왕후 릉

어느분도 빼놓을수 없어 9분의 릉을 다 담았습니다.

우리 역사 우리들의 지난 조선의 건립과 지탱 해 오신 왕들의 릉

한분이라 빠지는 것이 없이 담다 보니

사진 장수가 많았습니다.

이 외에도 담을 것이 있지만 그것들을 담지 않았습니다.

그것들까지 담았다면.....

 

아무튼 끝가지 와주시고 감상 해 주신 이눗님들께

깊히 감사 드립니다.

 

그럼 5월의 마지막 휴일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라 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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