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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간 여행

성북동 길상사

2022년7월28일 성북동 길상사 

 

 

안녕 하세요? 이웃님들!~

2022년8월1일 아침 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22년 반을 지나고 8월1일 첫주 월요일 

이웃님들!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8월을 시작하며 

한달을 이어 가시고 즐겁고 유익하게 행복하게

하루 하루를 엮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어제, 

길상사 능소화 포스팅 한 다음으로 

길상사 경내 돌아본  여름 풍경들 포스팅 해 봅니다.

오랜만에 들린 길상사 풍경 

언제 찾아와도 고즈넉하고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에서 길상사로 진입하려려면 '三角山 吉詳寺'라 쓰인 일주문(정문)을 들어서야 된다. 이
문은 200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된 것으로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
사 경내가 1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길상사 정량

 

일주문을 통과해 순서대로 정량부터 둘러 봅니다!~

 

소선대

 

정량(화장실)

 

 

 

극락전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했고, 그 우
측 칸에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칸은 중생
들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여기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
시 잊는다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불

극락전 불단을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년 11월에
조성되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불상으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
으로 중생을 맞는다.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 왼쪽에는 보관을 갖춘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불을 이루며, 두 협시보살(夾侍
菩薩)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다. 그들 뒤로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니(金
泥)후불탱화가 걸려있다.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만날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길상사 느티나무(왼쪽의 큰 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음보살상 건너편에 자
리한 것으로 마르지 않는 샘인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19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m, 둘레는 2.5m이다.

 

 

 

길상사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불교용품점도 겸하고 있음)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
과 극락전 등이 기존 요정 건물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지은 것으로 2004년
10월 17일에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년 5월 8일 완성을 보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닦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지장전 연못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으며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 인생을 마감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높다. 북한산 남
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경내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
러가며,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
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여러 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
의 거처인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북쪽 구
석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등이 빼곡히 자
리를 채운다.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을 칭하
고 있지만 앞서의 관음보살상처럼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년 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내가 찾아온 날도 눈이 푹신할 정도로 깔려 그때의 모습이 대략 그려진다.

나도 나중에 그에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우선 돈부터 왕창 긁어모아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서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
이가 절단난다.

 

 

< 김영한 보살 >

 

두 사람은 만난 지 하루 만에 동거를 시작해 석 달 간 꿈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습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가 바로 김영한입니다.

 

그런데, 백석의 아버지는 아들 백석을 기생인 김영한에게 떼놓기 위해 다른 여자와 강제 혼인시켰습니다.

그러자, 백석은 혼인날 밤 도망쳐 먼저 서울로 와 있는 김영한과 다시 만나 한동안 동거했습니다.

 

그러나, 김영한은 젊은 백석의 앞날을 걱정해 헤어지자고 했고,

그런 김영한에게 백석은 러시아로 떠나자고 졸랐습니다.

이에 김영한은 숨어버렸습니다.

 

사회주의 계열의 시인 백석은 혼자 러시아로 떠났고, 그 뒤 둘은 영영 생이별해야 했습니다.

해방된 다음 백석은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며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자 두 사람은 생이별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후 김영한은 서울에서 요정을 열어 큰돈을 벌었습니다.

김영한은 ‘대원각’을 열어 1960, 70년대 막후에서 '요정 정치 시대'를 펼쳐갔습니다.

‘대원각’은 당시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였고 지금의 ‘길상사’입니다. 요정

 

을 했지만, 허전한 그녀의 가슴을 채워준 것은 바로 법정 스님이 쓴 책과 불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김영한은 살아 생전 매년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 하루 동안 곡기를 끊고 방 안에 앉아 불경을 외우며 그를 기렸다고 합니다.

 

또한, 수억 원을 쾌척해 ‘백석문학상’을 제정, 문학도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백석과 다하지 못한 이승의 사랑을 저승에서 잇고자 소원하였습니다.

 

나무그늘에서 바라본 계곡과 길상헌 뒤쪽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 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을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 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했다고 한다..

 

 

 

 

 

법정스님 처소 진영각으로 가는길

 

 

 

여염집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작업과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적묵당을 감싸고 기와돌담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시
부터 17시(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정도. 인원
이 찼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지라 기다려야 된다.

 

 적묵당 앞 돌식탁 휴식공간

 

 

 

길상선원 입구

 

길상선원(吉祥禪院)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승려의 참선 및 처소.

경내 서북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길,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진영각 오릅니다!~

 

 

 

진영각(眞影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쪽 구석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 의 유품을 머금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년 7월부터 법
정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수
류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아두었으나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가 그의 3주기이던 2013년 3월 7일(음력 1월 26일)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
히 그리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나 있어
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우고 불교계의 명망 돋는 승려라고 해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지금
의 길상사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땅한 도리이다.

 

 

범정스님 제단 

 

 

 

 

법정스님 유품

 

 

진영각 내부 

 

 

 

 

 

 

법정스님이 앉아 계셨던 나무의자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흔쾌히 뿌
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도 두지 않아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설법전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설법전이 있다. 설법전은 일종의 강당(講堂)으
로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절 건물의 이
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년 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불좌상이 제일 앞쪽에 봉안되어 있다.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침침한 두 눈이 멀 지경
이다. 석가불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백 개의 조그만 옥불(玉佛)이 석가불을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범종각(梵鍾閣)


이곳에는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 새로 만든 종으로 대체했다.

 

 

 

'관세음보살 석상'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님이 봉안한 석상 
종교의 화해와 염원이 담긴석상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 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다고 한다.

 

길상사 극락전 뒤편 

아직도 능소화가 피어있는 예쁜 산책길 

 

 

 

 

 

길상사 극락전 뒤편 마치 동네 골목길 같다

 

길상사 극락전 기와 지붕 풍경

 

길상사 풍경소리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년 11월에 새로 심어진 길상보탑이 있다. 4마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塔
身)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길상사에는 그 흔한 석탑
도 하나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중,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인 백성학
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
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흔쾌히 이 탑을 기증했다.

겉보기에는 20세기 탑처럼 보이나 조선 중기(17세기)에 조성된 탑이라고 하며 탑 안에 복장봉
안품을 넣어 봉안했다. 그러다가 2013년 8월 25일,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정도 묵었다는
오래된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처의 오색정골사리, 옹혈사리, 아라한 사리를 입수하
여 그것까지 복장유물로 넣으면서 내부도 아주 빵빵해졌다.

탑이 자리한 자리는 원래 '바람 속 향기'라 불리던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
수 자판기, 조촐한 평상이 있었다. 허나 탑에게 밀려나 2012년 10월 정랑 서쪽으로 자리를 옮
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여기서는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길상보탑과 베롱나무 풍경

 

 

 

베롱나무

 

 

 

찌는듯한 무더운날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에 다녀왔다. 2년만에  찾았다

. 사찰 경내를 둘러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약 40분 정도 걸렸다. 지하철 4호선으로 한성대 입구까지 갔다.

한성대 입구에서 2번 출구로 나가면 다로 마을버스 성북 02번을 탈 수 있다.

마을버스로 약 10분 정도 가면 길상사 앞에서 내린다. 자동차로 갈 경우 사찰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주차장이 있다.

 

길상사(吉祥寺)는 1987년 공덕주 길상화 김영한 님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접하시고 감동받아 당시 음식점이던 대원각 대지 700여 평과 지상건물 40여 동 등 부동산 전체를 청정한 불도량으로 기증하고자 법정 스님께 오랫동안 청하시어 1995년 스님께서 그 뜻을 받아들이시고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대법사〕로 등록한 모두 둘러보고 길상사 방문을 끝맺음 한다....^.^

 

길상사 일주문 건너편 담쟁이 넝클로 장식한 저택 풍경

 

 

 

길상사 입구 

 

마을버스 02번 승강장 앞에서...

이제, 길상사 방문 끝을맺고 

02 마을버스 올랐왔던 길상사 길을 

도보로 내려 가면서 주변의 풍경들을 담아 봅니다!~

 

마을버스 02번 승강장

 

에티오비아 대산관

 

저택풍경

 

북악수퍼

 

10여전 부터 길상사 찾아 가는길에서 

빼놓을수 포토타임 사진 장소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수퍼

 

 

 

 

 

 

 

앙고라 대사관

 

 

 

 

성북 빌리지

 

누브티스

 

예전엔 카페가 영업 중이던 건물이였는데.

지금은 넥타이 판매점이다!~

 

 

 

성북동 하이츠 빌라

 

담쟁이 넝클 저택

가을에 담쟁이 잎이 붉은색이 되면 

멎진 사진 소재가 되는 저택 건물이다.

 

성북동 천주교 성당

 

 

 

 

 

 

 

길상사길 사거리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각 대사관 건물이 모여있다.

 

프란치스코 동상

 

작은 형제회 (성북동 천주교 별관) 

 

 

길상사 역사

 

본래는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1] 김영한은 일제 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처음 1985년에 김영한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이에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처음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고 같은 해 2월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이 취임하였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김영한의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영한은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1999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고, 김영한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었으며,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 로 입적하였다. 또한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열리던 1997년 12월 14일에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함께 나란히 축사를 했고 법정 또한 이에 답하여 1998년 2월 24일에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하였다. 길상사 경내에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의 영정과 그 생전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등의 전각이 있으며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가 존재한다. 2011년 이후 덕운이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불교 자선재단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한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 예술가인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 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다.

 

사찰명

 

길상사(吉祥寺)의 절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란 의미로, 묘길상(妙吉祥) 곧 문수보살의 별칭에서 인용된 불교용어이며,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창건 당시의 이름이 송광산 길상사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송광산 길상사가 새로운 규모로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9년 동안 중창불사를 통해 절의 규모를 확장하고, 정혜결사를 통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근본도량으로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송광사는 현재 오늘날까지도 승보사찰로 불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선종사찰로 여겨지고 있다.

법정 스님은 1993년 10월, 뜻있는 작가와 신도들과 함께 프랑스에 ‘송광사 파리 분원 길상사’를 개원하였다. 그리고 1995년 김영한 여사로부터 대원각을 기증받아 송광사 분원 대법사로 등록하였다가, 길상(吉祥)이라는 말을 좋아하던 법정 스님은 1997년 1월 29일 창건 준비인 모임에서 처음으로 ‘길상사’란 절 이름을 공식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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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방문기 여기 까지 입니다!~

많은 사진과 글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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