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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간 여행

태릉, 강릉 숲길 개방

2022년6월11일 태릉,강릉 숲길 개방

 

안녕 하세요?

 

오늘은 어제의 화랑대역

경춘선 숲길 이은 태릉,강릉 숲길을 소개 해 봅니다.

 

태릉,강릉은

경춘선 숲길 옆 도로

화랑로 걷고 싶은거리

즉 화랑대 사거리에서 부터 삼육 대학교 까지

총 14.1km 의 거리를 걷다가 태릉 사격장에서 500m 떨어진 (삼육대 방향) 위치 있는 릉 입니다.

화랑로 걷고 싶은 거리, 일명 낙엽거리는

 

늦가을 낙엽비를 맞으며 여유를 만끽하다

서울에서 낙엽과 단풍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곳이여럿 되지만

태릉 입구에서 삼육대로 이어지는화랑로는 그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향해 곧게 자란 플라타너스가 길 양쪽으로 늘어서있는데 그 길이만도 8.6킬로미터,

이야기를 나누며산책하듯 걸으면 2~3시간은 족히 걸린다 하고.

서울에서도가장 긴 가로수길이다.무성하게 자란 잎이 녹색 세상을 만드는

여름을 지나늦가을로 접어들면 온통 낙엽으로 뒤덮입니다

. 특히가을에는 낙엽을 치우지 않는 거리로 유명해 찾는이들이 많습니다.

 

암튼 어제

경춘선 숲길 걷고 둘러보고 난뒤

찾은 태릉,강릉 숲길

그동안은 태릉 만 주로 찾아는데

올 상반기 5월16일 부터 태릉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숲길이 개방되어 태릉을 둘러보고 개방된 숲길을 걸어며

강릉도 둘러 보게 되었습니다

 

태릉 조선왕릉 전시관

 

집에서 멀지 않아 가끔 '태릉'에 간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강릉'은 가는 때가 정해져 있다.

요즘처럼 태릉~강릉을 이어주는 숲길(야트막한 산길)을 개방할 때다.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은 여러모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사적 제201호로 함께 지정됐고,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산하의 관리 주체도 같다.

 

 

전시관앞 조각물들

 

 

 

태릉 릉 초입길 들어서자 마자

주변 어린이집에서 소풍 나온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아이들과 안녕 하며 지나가 봅니다!~

 

이곳은 태릉 릉길과 숲길산책길이 나누어 지는데.

사진으로 봐서 좌측길이 릉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곳도 마찬가지 촤측길 입니다~

 

 

 

태릉 홍살문

 

태릉 정자각

 

태릉 릉

 

태릉은 중종(中宗)의 두번째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의 무덤이다. 그녀는 조선시대 최고의 권세를 누린 왕비로 평가된다. "정희왕후나 소혜왕후, 순원왕후, 신정왕후, 명성황후 등의 왕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순왕후도 문정왕후가 누린 위세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그 위세를 말해주듯이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웅장하다.

태릉은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 씨의 능으로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알려진다.

문정왕후에 관한 일화는 워낙 많지만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난정의 일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므로 위계가 철저한 조선에서 그녀가 일어설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난정은 이 기회를 반전하기 위해 우선 기생이 되었다. 고관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생은 격이 낮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녀는 바람대로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 윤원형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모두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곧바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한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결국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만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 씨를 몰아낸 다음 적처1) 가 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 전매·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1553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난정에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으로 꽉 차 있지만 그녀는 윤원형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신분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문정왕후는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와 비교될 정도로 억척같은 집념으로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문정왕후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인 명종이 손꼽히기도 한다. 왕이 된 아들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왕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녀의 월권은 적어도 국왕의 권위를 누르거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렴청정을 끝내며 문정왕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리나라가 불행하게도 두 대왕이 연이어 사망했으므로,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어 국정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섭정을 하기는 했으나, 미안한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못했다. 더구나 재변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변고가 함께 발생함이 지금과 같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 아닌가 해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했으며 2~3년 이래로는 항상 성상께 귀정(歸政)하고자 했으나, 아직 주상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해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는 까닭에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태릉 비각

 

그러나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 옆에 묻히고 싶었는지 원래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서삼릉 내) 우측에 있던 중종의 능을 정릉(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터로 옮겨놓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정릉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자, 명종이 장마철에 물이 들어온다는 명분을 대고 태릉에 안장해 결국 그녀의 뜻은 무산된다.

태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岡)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는데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 신을 의미하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 위의 만석 중앙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12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이유는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여기에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문·무인석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다. 문인석은 높이가 260센티미터로 사람의 실제 키보다 크며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 차림이다. 두 손으로는 홀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좌측 문인석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우측의 문인석은 반대 자세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인석이 홀을 잡는 방법이 동일한데 이곳은 예외다.

무인석은 문인석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얼굴이 크고 방울눈에 유난히 큰 코와 우락부락한 표정이 특징이다. 문·무인석 모두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다. 학자들이 이들 석상에 큰 점수를 주지 않는 이유는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기둥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정자각은 6·25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과 그 앞의 배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금천교를 만날 수 있으며 태릉의 소나무 숲은 신림(神林)으로 불릴 만큼 울창해 도시에서 얻을 수 없는 풍취를 느끼게 한다.

임진왜란 직전 조영된 태릉은 효인이라는 사람이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년 1월 왜군이 기마병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삼물의 회(灰)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릉 정자각에서 담은 태릉 홍살문 쪽 풍경

너무 이쁜 풍경 이네요~

 

 

 

태릉 릉옆 소나무 숲 풍경들

 

개방된 태릉과 강릉숲길

 

태릉 릉과 주변 소나무 숲을 둘러보고

개방된 강릉과 연결된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 봅니다.

강릉 까지는 1.8km 30분의 시간이 소요 됩니다 릉옆 소나무 숲 풍경들

 

 

 

 

후훗!~

천천히 태릉,강릉 숲길을 산책하듯 걷습니다.

시원한 숲내음

그리 덥지도 않고 힘들지 않습니다.

소나기 예보가 있었던 것처럼

하늘이 맑았다 흐렸다 하니 산책하듯 걷는데.

숲속이 무더위를 식혀 줍니다~

 

 

 

 

 

 

숲길 사이에 쉼터가 있고

벤취 의자가 있어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 분들도

쉽게 숲길을 걸을수 있습니다!~

 

 

 

 

아무생각없이

걷고 걷다보니 어느새 강릉에 도착 했습니다.

강릉 릉 옆으로 나있는 태릉,강릉 숲길 시작점으로

나와서 강릉 릉을 둘러 봅니다.

 

 

강릉 홍살문

 

 

강릉 정자각

 

강릉 릉

 

강릉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의 아들인 제13대 명종(1534~1567)과 인순왕후(1532~1575) 심 씨의 능이다.

명종은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후부터 8년간 문정왕후 윤 씨가 섭정했고 15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친정했지만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3년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했다. 1569년(선조 2)에 의성(懿聖)이라는 존호가 진상되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했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 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관료층의 분열과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명종은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즉위해 조선 왕조 시대의 격변을 누구보다 심층적으로 겪었다.

중종의 제1계 비인 장경왕후 윤 씨 소생의 세자 호(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윤임 일파의 대윤과,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명종)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인종이 우여곡절을 겪고 즉위하자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며 이언적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해 대윤에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을사사화 이후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을 정도다. 당시의 정황을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 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관료층의 분열과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명종은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즉위해 조선 왕조 시대의 격변을 누구보다 심층적으로 겪었다.

중종의 제1계 비인 장경왕후 윤 씨 소생의 세자 호(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윤임 일파의 대윤과,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명종)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인종이 우여곡절을 겪고 즉위하자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며 이언적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해 대윤에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을사사화 이후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을 정도다. 당시의 정황을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당파 싸움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명종은 친정하면서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워낙 깊숙이 박혀 있던 기득권 세력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정치는 더욱 문란해졌다.

민생이 어려워지자 양주 지방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이 의적을 자처하며 1559년부터 1562년 사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임꺽정의 난은 3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난 중에서 상당히 장기적인 경우다. 위계가 철저한 시대였지만 난이 오래 지속된 이유는 백정이 도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명종실록』에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정확하게 적혀 있다

 

당시의 집권자들이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었다는 말이다. 임꺽정이 출현할 당시 황해도 지역은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정도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에 쪼들린 농민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도적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처음에는 구월산, 서흥 등 산간 지대였으나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면서 평안도와 강원도, 안성 등 경기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임꺽정의 무리가 계속 증가한 까닭은 약탈 대상이 이른바 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무리는 관청이나 양반, 토호2) 의 집을 습격해 그들이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인 재물을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기도 했다. 민중들이 임꺽정을 비호한 이유는 그가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 저항 수준의 반란군이었기 때문이다.

명종은 이들을 '반적'이라 부르며 토벌을 명령했지만 임꺽정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조선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꺽정의 난이 진압된 것은 1562년 1월, 토포사 남치근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서였다. 관군에 체포된 서림이 길잡이로 나서 결국 임꺽정은 부상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임꺽정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 강원도 철원군 고석정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꺽정은 고석정 앞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 안에 숨어 지내면서 조공물을 탈취해 빈민을 구제했다고 한다.

 

임꺽정의 난이 진정되었지만 우환은 계속된다.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3) 의 감소로 곤란에 처한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는 을묘왜변을 일으킨 것도 명종의 치세 동안이다. 정황이 좋지 않음에도 명종이 친정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인재 등용이었다. 그는 인재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종이 매료된 인물이 바로 퇴계 이황이다. 당대의 어지러운 세상에는 퇴계와 같은 인물이 더욱 필요했지만 퇴계는 병을 칭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경상도 지방에 은거했다. 명종은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이황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지만 이황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명종의 부름을 사양했다. 그러자 명종은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독서당에 문신들을 모아 놓고 '초현부지탄(招賢不至灘,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다)'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한 것이다.

명종의 개인적인 불행도 계속되었다. 1563년 순회세자를 잃고 2년 뒤 어머니 문정왕후마저 세상을 뜨자 허약했던 명종은 병을 얻어 1567년 경복궁 양심당에서 사망했다. 명조는 영조(52년), 숙종(46년), 고종(44년), 선조(41년), 순조(34년), 세종(32년), 인조(26년), 성종(25년), 정조(24년)에 이어 2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지만 사망할 때 나이는 겨우 34세였다.

강릉의 참도는 조선 왕릉의 여타 참도와 다소 다르다. 참도 자체가 매우 넓은 것은 물론 좌측 신도는 약 30센티미터, 우측 어도는 약 15센티미터 높게 시공되어 있다. 또한 정자각의 월대로 오르는 계단은 일반적으로 3단인데 이곳은 한 단 높아 신계와 어계가 4단이나 된다.

강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쌍봉 능이며, 두 능 모두 병풍석을 둘렀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었다. 봉분의 봉토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인석引石에 꽃무늬를 장식한 것이 이색적이다. 대체로 태릉과 마찬가지이나 혼유석은 각각 설치했다. 상설 제도에 의해 장명등, 망주석, 석호, 석마, 석양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보존 상태가 모두 양호하다.

 

강릉비각

 

문인 공간에 세워진 장명등은 조선 초기 건원릉과 헌릉을 본뜬 16세기 복고풍 장명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대가 하대석보다 좁고 몸체 부분이 긴 형식은 할아버지인 성종의 선릉에서부터 나타났다.

문인석은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목이 짧아 머리가 양어깨 사이를 파고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복장은 복두를 쓰고, 관복을 걸치고, 두 손에는 홀을 쥐고 있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강릉의 문인석은 좌우에 따라 손의 위치가 다르다. 태릉을 조각한 작가들이 강릉 조영에도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인석은 좌·우측이 서로 다르다. 둘 다 코에 붉은빛이 돌지만 좌측은 투구와 얼굴 크기가 엇비슷한 반면, 우측은 투구가 작고 코가 둥글며 턱과 양쪽 볼이 튀어나와 묘한 인상을 준다. 표현도 좌측 무인석은 팔꿈치에 구름무늬, 등과 무릎 부분에 비늘무늬를 새긴 반면, 우측 무인석은 띠가 생략된 가슴의 전면에 파도 무늬를 조각했으며, 양 어깨에는 귀면을 새기는 등 조각하기 어려운 화강암임에도 수준이 높다. 석상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많이 퇴화하기는 했으나 나어두문에서 입체감이 느껴질 만큼 굴곡 깊게 새겨놓았다.

강릉은 원형 보존을 위해서 그동안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2013년 1월 1일부터 개방하고 있다.

 

수라간

 

강릉 주변 숲

 

강릉 정문으로 나가는길

 

강릉 정문

 

강릉은 삼육 대학교 정문 옆에

출입구 정문이 있더라구요.

강릉만 찾으시고 둘러 보시는 방문객들은

삼육 대학교 를 기억 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태릉~강릉 사이를 잇는 숲길 구간(1.8km)은 일년에 두 번 개방한다 합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5월 16일부터 6월 30일까지이고,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하반기에는 10월과 11월 두 달이다. 나머지 기간에는 태릉~강릉 숲길이 폐쇄돼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합니다.

 

입장료는 성인 1000원인데, 노원구민은 50% 할인해 500원만 내면 되고

. 입장권을 사면 그날 하루 동안 태릉과 강릉 둘 다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신규 개방한 태릉쪽 소나무숲길(400m 구간)은 앞으로 상시 개방하는데,

가꾸는 중이라서 숲의 정취를 느끼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할것 같습니다.

 

막혔던 태릉,강릉 숲길

오랜만에 호젓한 태릉,강릉숲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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