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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간 여행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 영원한 청년을 만나는 곳

2022년5월10일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 영원한 청년을 만나는 곳

​안녕 하세요? 이웃님들!~

5월10일 윤동주 문학관

시인이의 언덕을 다녀 왔습니다!~

 

윤동주 문학관

​인왕산 자락, 문학청년 윤동주가 시심을 키우던 곳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화상> 中

​평생을 주권 없는 나라의 학생으로 살았던 시인.

생각해 보면, 그에게 청운동 하숙 시절은 인생의 마지막 호시절이었다.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고, 하늘과 바람과 별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

그렇게 생각하니 멀리 보이는 인왕산이 왠지 짠하게 느껴졌다.

 

윤동주 문학관, 그의 시 같은 삶을 담은 공간

“나는 무엇을 바라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쉽게 씌여진 시> 中

​‘윤동주 문학관’은 대학 시절 그가 하숙하던 종로구 누상동 바로 윗 동네, 청운동에 있다.

두 동네는 인왕산 자락을 따라 이어져 있는데 윤동주는 이 길을 따라 걷길 즐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하며 산골짜기 아무 데서나 세수를 하곤 했고, 밤에 시를 쓰다가도 나와 걸었다.

 

새삼스레 윤동주는 참 자기 같은 시를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시를 쓸 때 종이에 옮겨 적기까지 오랜 시간 숙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남긴 메모만 봐도 그가 얼마나 끊임없이 성찰하는 사람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불어> 中

​시인이 죽은 뒤에야 세상에 나온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천성이 선하고 여린 사람이었지만, 그는 내면에 굳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다.

중학생 때 신사 참배 거부 의사를 밝히며 학교를 자퇴했을 정도로 의식이 남달랐던 소년은,

대학생이 되어 시집을 내기로 한다. 한글이 엄격히 금지된 시대에 한글로 쓴 시를 출판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 때문에 출판은 좌절됐고,

결국 시집은 그가 죽고 나서야 세상에 나왔다. 그 시집이 바로 우리가 아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윤동주를 회상하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반듯하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결코 다른 이를 헐뜯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사람

분노하거나 탓하는 대신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 1 전시실을 둘러보고 나니,

마치 원래 아는 사람인 듯 건실한 청년 윤동주의 이미지가 또렷하게 그려졌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中

 

 

 

윤동주 문학관 2전시실 열린 우물

​시인의 영혼을 짓밟은 사건, 창씨 개명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中

​2전시실과 3전시실은 용도 폐기된 물탱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만들었다.

2전시실은 열린 우물로 1전시실과 3전시실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한다.

벽에는 물탱크로 쓰던 시절 생긴 물때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세월이 남긴 쓸쓸한 흔적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1전시실에서 봤던 윤동주의 학적부가 자꾸 떠올랐다.

윤동주라는 이름 위에 빨간 줄을 긋고 대신 ‘히라누마 도슈’라는 일본식 이름을 써넣은 종이. 창씨 개명의 낙인이었다.

​당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 개명을 선택했다고 한다.

창씨 개명을 하지 않으면 일본 유학을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 졸업 후 뚜렷한 진로의 방향을 잡지 못하던 시인에게, 일본 유학은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관문이었을 것이다.

 

용도 폐기된 물탱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만든 닫힌 우물. 시인의 일생을 담은 영상을 보고, 사색하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3전시실을 말한다.

2전시실이 열린 우물이라면 3전시실은 닫힌 우물로, 건물 제일 안쪽에 있어서 .

이곳에서 15분에 한 번씩 윤동주의 일생을 담은 영상이 상영된다.

영상이 끝나고 배경 음악이 천천히 잦아들어 숨소리만 남은 순간.

나는 이곳이 시인 윤동주가 홀로 침전하던 남의 나라의 육첩방 같다고 생각했다.

​구멍에서 새어 나온 한 줌 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춥고 캄캄한 방.

그곳에서 시인은 수많은 부끄러움을 헤아리며 시를 썼을 것이다.

내 나라를 빼앗아간 남의 나라에 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하나.

고생하는 부모님에게 기대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하나.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못하고 방에 앉아 시를 쓰고 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하나.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 中

​이 시를 마지막으로 윤동주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사한다.

1945년 2월, 6개월만 기다리면 시인이 그토록 원하던 광복이었다.

 

 

문학관을 나와 청운 도서관으로 오릅니다.

 

청운 문학 도서관길 입구

 

 

 

 

 

청운 문학 도서관

 

도서 열람실은 지하에 있어 지하로 내려 갑니다!~

 

 

도서실내부

 

 

 

도서관 옆 작은 공간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쉼터 같은 공간

저 같이 문학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이 들은 좋아할 공간 입니다!~

 

 

 

인왕산길

 

 

청운정

 

시인의 언덕길

 

 

어느 대학 문학과 학생들이 윤동주 문학관과 시인의 언덕에 올랐다고 한다.

아마, 윤동주 시인의 인생과 창작에 대한 열정 을 배우기위함인듯 하다...

 

 

서시 바위

 

윤동주 시인 그당시에도 이곳에서 서서

그때의 서울시(경성시) 내려다 보며 많은 생각과 시상을 떠 올렸을까 싶다.

 

 

시인의 언덕 야외 음악당

가을엔 많은 문학의 밤을 들이 이곳에서 많이 개최된다고 한다.

 

윤동주 문학관 뒤편으로 올라가면 ‘시인의 언덕’이라는 산책로가 있다.

실제로 윤동주는 이곳 인왕산 자락 길을 따라 산책하길 즐겼다고.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자의로 119 풍경

 

 

 

 

 

 

부암동길

 

지자체마다 유명한 시인이나 소설가의 문학관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눈물겹다. 심지어 아직 생존해 있는 저명한 문학인들을 관내로 모셔가기 위해 개인 집필실과 문학관을 제공하고 있다. 춘천에 살던 이외수 작가는 강원도 화천군 감성마을에서 마련한 집필실과 문학관으로 거처를 옮긴 지 오래고, 경기도 수원시는 경기도 안성에 살고 있는 시인 고은 선생을 위해 수원 광교산 기슭에 있는 주택을 리모델링 중이다. 고은 선생이 이주를 확정하면 추가로 문학관도 건립한다고 한다.

2004년만 해도 전국에 문학관이 열네 개밖에 되지 않았는데, 2012년에는 한국문학관협의회에 등록된 문학관 수만 해도 무려 60개로 늘었다. 지자체들이 이렇게 문학관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역시 관광 수입 때문이다. 물론 2002년부터 문학관을 건립하는 지자체에게 정부에서 건립비의 40퍼센트를 지원하는 것도 ‘문학관 광풍’을 유발한 요인 중 하나다. 그렇지만 역시 특정한 역사적 유물이나 볼거리가 없는 지자체에서 유명 시인이나 소설가의 집필실이나 문학관을 유치하면 지역의 문화적 위상도 높이고, 문화상품을 개발하여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으니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실제로 효과가 입증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외수 작가가 화천군에 정착한 첫해에는 약 2,000여 명이던 관광객이 2012년에는 무려 열 배가 넘는 2만 5,000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재정 자립도가 높지 않은 지자체의 입장만 보자면 뭐라 할 수 없지만, 이런 느닷없는 문학관 유치 열기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작가와 특별한 연고도 없는 지역에 문학관을 만든다든가, 이미 다른 곳에 있는 같은 작가의 문학관이 경쟁하듯 이곳저곳에 세워진다든가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뿐만이 아니다. 건물만 번듯하게 지어놓고 정작 제대로 된 전시품이 없는 곳도 많고, 도저히 접근하기 힘든 산속에 지어놓아 일반인들이 찾아가기 어려운 곳도 있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담아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단지 관광 상품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열풍과는 달리 조용하지만 문학의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문학관이 있다. 종로구 청운동에 자리한 윤동주 문학관이 바로 그곳이다. 청와대 옆길을 지나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한양 도성 4소문(小門) 중 하나인 창의문이 있다. 한양 도성 4소문이란 동북쪽 홍화문(弘化門), 동남쪽 광희문(光熙門), 서남쪽 소덕문(昭德門), 서북쪽 창의문(彰義門)을 가리키는데, 창의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흰색 건물이 윤동주 문학관이다

​건너편에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는 북한 무장공비와 총격전을 벌이던 중 산화한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서 있고, 아래쪽에는 오렌지색 지붕의 물결이 이국적으로 펼쳐져 있다. 저 멀리 남산까지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뒤쪽에는 청운동 ‘시인의 언덕’이 있다. 막상 올라가 보면 휑한 언덕에 시비(詩碑)를 몇 개 뿌려놓아 이름에 걸맞은 시적인 분위기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잘 복원해놓은 서울 성곽이 더 인상적이다. 청운아파트의 흔적을 잘 살려서 이곳에서 시적인 영감을 받았을 시인들의 시구를 새겨 넣었으면 더 운치 있고 좋았을 것 같다. 이곳은 원래 청운시민아파트가 있던 자리로, 11동 500여 가구가 2005년까지 살았다. 청와대와 가까워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연결하는 능선에 버티고 서 있던 아파트를 철거하면서 그 자리에 시인의 언덕을 조성한 것인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