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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간 여행

한양 도성 성벽길 1코스 북악산길(창의문,말바위)답사

최규식 경무관 동상

​2022년 5월11일 한양 도성 성벽길 1코스 북악산길 (창의문, 숙정문, 말바위) 탐사

​안녕 하세요?~ 이웃님들!~

 5월11일 세째주 일요일

한양도성 성벽길 1코스 북악산길을 답사 하고 돌아 왔습니다.

​집을 나선지 1시간후 오전 11시에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윤동주 문학관 건너편 버스 정거장 도착 하였습니다.

오전 11시 부터 한양 도성 성벽길을 답사 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작년 봄에 한번 다녀오고 이번이 두번째 입니다.

오늘, 한양도성 성벽 북악산길 많은 등반을 하시더군요.

5월의 세째주 휴일 점점 더워지는 날씨 탓인지?

너무나 많은 분들이 한양 도성 북악산길을 걸어 오르시더 라구요!~

그 가운데서 저도 이분들과 같이 오르고 걷고 사진도 담았습니다.

곳곳에서 사진 찍기가 불편 했지만 열심히 나름대로 담고 오르고 걷고 하였습니다!~~

이제, 제가 답사한 한양도성 북악산길 하나하나 포스팅 하겠습니다!~~

편하게 감상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종수 경사 순직비와 동상

​우선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정종수 경사 순직비와 동상을 담았습니다.

 

다들 아시죠?

버스에서 내리면 이 계단으로 오르셔야 한다는 것을요~

저는 집에서 지하철 한번 5호선 광화문 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와서 교보문구 앞 버스 정거장에서 시내버스 1020번을 타고

청운 공원 윤동주 문학관 건너편 정거장 내립니다.

 

 

창의문

​창의문 앞에선 시간이 11시10분이였습니다.

한양 도성 북아산길을 찾아오신 많은 등산객들 께서

저처럼 사진을 찍고 계시는 바람에 조금 기다렸다 담았습니다!~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제 구실을 못하였기에 이 문이 그 문의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는 자하가 많이 끼였는가 서울 내기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은 4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등치로는 건축면적 49.587m²(15평) 안팎의 조그마하지만 매우 단단하고 굳건한 기풍을 풍기는 건축물이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 놓은 것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 이귀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창의문 안내소

먼저, 안내소에서 출입증 받아서

안내소 옆문으로 나가서 북악산 탐방 길로 오릅니다.

 

여기서부터 첫발을 내딛습니다.

 

계단씩이라 많이 힘들지 않습니다!~

 

조금 오를다 뒤돌아 보니

저 만치 인왕산 정상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담았습니다!~

 

 

 

1차 쉼터에서 남산방향 풍경도 담습니다!~

 

북악산 탐방1차 쉼터

 

 

하나하나 계단을 밟고 오르다 힘들면 잠시 쉬면서

담는 풍경 입니다!~

 

 

 

 

백악쉼터.

​후후 1년많에 다시 찾은 한양도성 북악산길

계단 길이라 하지만 조금씩 오르다 보면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조금 연세가 있으신 분들도 힘들어 하십니다!~

이분들과 저도 15분을 쉽니다!~

 

 

백암쉽터에서 15분을 쉬고 다시 출발 합니다.

 

 

 

 

드디어 백운봉 고지가 멀지 않는듯 합니다!~

 

 

백운봉 길

 

 

 

 

백운봉에서 담은 경치 입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셔서 사진 찍기 여념이 없습니다~

저도 겨우 겨우 담았습니다.ㅎㅎ

 

백운봉에서는 10분을 쉬었고

다시 숙정문으로 향해 걸음을 재촉 합니다!~

 

 

 

1·21사태 자국 꽃이 소나무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31명은 그 해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金正泰)에게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하였다.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룻밤을 숙영(宿營), 19일 밤 8시 30분경 임진강의 얼음판을 횡단, 당시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의 삼봉산(三峰山)에서 2일째 숙영을 한 다음,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僧伽寺)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이날 밤 10시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되자, 일당은 “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의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으며 계속 행진하였다. 약 400여m를 더 행진했을 무렵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병력과 첫 접전이 벌어졌다.

게릴라들이 먼저 자동소총을 쏘며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총경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때부터 게릴라들은 현장을 지나가는 버스 안에 수류탄 1발을 투척, 승객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군경합동수색진은 일당 가운데 김신조(金新朝)를 발견, 생포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그날 밤 게릴라 5명을 사살한 데 이어,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들이 장비한 습격용 무기는 기관단총(PPS) 31정(1인당 1정씩 휴대), 실탄 9,300발(1인당 300발씩 휴대), TT권총 31정(전원 휴대), 대전차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방어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단도 31정(전원 휴대)이었다.

북한 민족보위성은 김일성(金日成)의 이른바 ‘항일빨치산전술’을 근거로 하여 대남적화공작에서 적극적인 유격전 활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결정, 1967년 4월 정찰국 산하에 유격전 특수부대인 ‘제124군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특수부대는 일반 군부대에서 선발된 척후병·통신병·운전병·특무장(特務長) 등과 제283군부대 및 집단군 도보정찰소에서 엄선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연산(延山)과 상원(祥原) 일대의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특수교육의 내용은 적배치상황이론, 지뢰 극복을 위한 정찰병 기본 동작, 지형학, 사격, 침투훈련 등이었다.

8개 기지 가운데 제6기지에서 서울·경기도 지역에 대한 유격 파괴공작을 담당하였는데, 1968년 1월 2일 민족보위성으로부터 청와대·미대사관·육군본부·서울교도소·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일제히 습격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제6기지 유격대는 장교 25명의 유격대원을 엄선하여 그 해 1월 5일부터 황해도 사리원으로 이동, 노동당 도당청사를 청와대로 가상하고 청와대 정문 사진과 전경 사진을 익히면서 습격훈련을 실시하였다. 1월 13일 정찰국장 김정태는 이 훈련장소를 방문, 독려하면서 습격 대상을 청와대로 지정하였다.

특공대 규모는 처음의 25명에서 31명으로 증원되었으며, 전원 함경도 출신의 장교들로 충원되었다. 이들은 1월 14일부터 이틀 동안 집체 사격훈련을 받은 뒤 남파되었는데, 기습계획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습격시간은 밤 8시이며 당일로 복귀한다. 습격 소요시간은 3∼4분간이며 증원군의 추격을 받지 않도록 한다. ② 습격 전날 북악산 부근에 숙영하여 청와대를 관측, 정찰한다. ③ 전원 사복으로 갈아입고 취객(醉客)을 가장하여 접근, 유격대원끼리 시비를 걸다가 기회를 포착, 청와대 초소를 기습한다.

④ 제1조는 청와대 2층을 기습, 기관단총으로 무차별 사격하여 인원을 살상하고 수류탄을 투척한다. 제2조는 청사 1층, 제3조는 경호실, 제4조는 비서실, 제5조는 정문 보초 및 기타 보초 등을 맡아 살상, 파괴한다. 운전조는 차량을 탈취하여 탈출 준비를 완료한다.

⑤ 습격이 끝나는 즉시 분승하여 문산 방면으로 도주, 그날로 복귀한다.

정부는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 국회국방위원회에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였다. 또한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되는 사건이 돌발하였다.

1월 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 본회담에서 유엔군측 수석 대표는 푸에블로호사건과 함께 북한 게릴라 부대의 서울 침투와 그들의 민간인 살상 등 만행을 규탄하였다.

북한측은 한국이 휴전 당사자가 아니므로 1·21사태는 본회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등 무리한 답변으로 그들의 만행을 호도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이 사태가 좌경 극렬분자의 행동이었음을 시인하였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서두르게 되었다.

 

 

1·21사태 총탄자국 소나무 을 보고 다시 숙정문으로 갑니다!~

 

 

 

청운대 넓은 휴식 공간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사진 찍기가 쉽지 않습니다.

 

 

 

 

 

 

 

 

 

쉼터

 

 

 

 

백악곡성길 전망대 길

 

 

백악곡성 전망대

 

 

 

백악곡성 전망대 에서 담은 제가 걸어 왔던 북악 탐방로를 담습니다.~

 

다시 숙정문으로!~~~~~히히!!~

 

 

촛대바위 전망대

 

촛대바위

 

촛대바위 낭떨어지 아래에서 봐야 제대로 보이는데.

내려 가는길이 없으니 이렇게 감상 합니다!~

 

 

 

오!~ 저만치 숙정문 시야에 들오 옵니다!~

 

숙정문

​본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하였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숙청문(肅淸門)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창의문(彰義門, 일명 紫霞門)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길이 매우 험하다. 또 성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 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한양에 출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동소문을 통과했지 숙정문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숙정문보다 동소문이 한양 출입에 훨씬 빠르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문을 폐쇄해도 통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넘뮨안 숭례문(崇禮門: 南大門)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에서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이라고 한다.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俗說)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이 문이 음방(陰方: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 때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고 ‘肅靖門(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정문으로 개칭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523년(중종 18) 『중종실록』의 기사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어 숙정문이라 호칭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531년(중종 26) 북정문(北靖門), 1587년(선조 20) 숙정문(肅靜門)으로도 표기된 것을 볼 때,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숙정문(肅靖門)’으로 명명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다락 없는 암문(暗門)인 것이 특색이다.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흔히 숙정문 대신에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하였다.

 

이래저리 등반객들 때문에 사진 담기 쉽지 않습니다.

마음 비우고 그냥저냥 답습니다!~ㅋㅋ

 

이쯤 왔어니 이젠, 말바위만 남아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부턴 여유있게 천천히 걸어 가네요!~

 

 

 

드디어 말바위 안내소

출입증 반납하고 말바위로 내려 가야겠죠!~

 

 

 

 

 

북악산 탐방로 조망권 전망대 이자

전망대 아래로 와룡 공원 길이다

 

 

전망대에서 담은 풍경 들입니다!~

 

 

 

말바위

 

말바위 아래 조망권 전망대

 

 

말바위 조망권 전망대에서 담은 남산 방향

경복궁 쪽 풍경

 

 

이제 끝으로 삼청 공원으로 내려 갑니다!~

 

 

 

 

 

 

 

 

 

 

 

 

 

여기까지!....

휴유!~

오늘 한양도성 성벽 답사

북악산 성벽길 을 마쳐 보았습니다.

이제 저도 예전보다는 성벽길이 힘듬을 느껴 보았습니다.

작년만해도 그다지 힘들다 숨이 자주 차오르는 것을 못 느꼈는데.

오늘은 하체의 다리 힘도 예전 같지 않고 숨도 자주 차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저도 느끼기에 조심하며 답사를 하였지만

앞으로 이같은 성벽길이나 순례길이 걱정입니다.

사진을 하는 동안은 한번씩은 가보고 올라야 하는데.

몸이 예전 같지 않음에 다 가보고 마칠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끝!~

부족한 많은 저의 사진을 끝까지 봐주시고 감상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